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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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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막은 조조, 조비, 조예 시대에 걸쳐 활약한 위나라의 관료이다. 하북 평정 후 등용되어 승상군모연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특히 량주 자사로 재임하며 제갈량의 북벌에 대응하고, 농업 진흥과 서역과의 교류에 기여했다. 강족을 토벌하고 도정후에 봉해졌으며, 청렴한 생활로 존경받았다. 사공으로 추대되었으나 사퇴하고 대부로 있다가 78세에 사망했으며, 무후의 시호를 받았다. 동진의 원굉은 그를 위나라의 명신으로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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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서막
원어 이름徐邈
경산 (景山)
시호목후 (穆侯)
출생172년
출생지계현 (薊縣)
사망249년 (향년 77세)
작위도정후 (都亭侯)
경력
주요 활동군사 장군, 정치가
섬긴 국가후한, 조위
주요 관직광록대부 (光祿大夫), 사례교위 (司隸校尉), 대사농 (大司農), 건위장군 (建威將軍), 호강교위 (護羌校尉), 양주자사 (涼州刺史), 무군대장군군사 (撫軍大將軍軍師)
군주조조, 조비, 조예, 조방
가족 관계
자녀서오 (徐武)
왕준의 아내

2. 생애

조조가 하북(河北)을 평정했을 때 등용되어 승상군모연(丞相軍謀掾)이 되었다.[2] 시험 삼아 봉고현령을 맡은 후, 동조의령사로 옮겼다. 가 번국으로 건국되자 상서랑이 되었다. 당시 금주령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서막은 술을 마시고 취해 곯아떨어져, 직무상의 질문에 "성인(청주의 은어)에 당했다"라고 대답하여 조조의 분노를 샀다. 선우보는 이를 "서막은 신중한 성격으로, 우연히 술에 취해 내뱉은 말일 뿐입니다"라고 변호했고, 서막은 법에 따랐지만 형벌은 면했다.

그 후, 농서태수・남안 태수가 되었고, 조비(문제)의 즉위 후에는 초현령・평양 태수・안평 태수・전농중랑장을 역임했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얻었다. 조비는 과거 서막의 발언을 끌어내 놀렸지만, 서막이 기지에 찬 대답을 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여 무군대장군군사로 임명했다.

조예(명제)가 즉위한 후 태화 2년(228년)[2], 촉한과의 국경 지대인 량주의 자사로 임명되었고, 사지절 호 교위를 겸임했다. 같은 해, 제갈량이 위령으로의 북벌을 시작하여, 천수군의 기산에 침입하자, 이에 호응한 농우 삼군(천수군・남안군・안정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막은 참군과 금성태수 등을 파견하여 남안의 반도를 격파했다.

하우 일대는 비가 적어 항상 곡물 부족에 시달렸다. 서막은 염지를 수리하여 미개척지에서 곡물을 수확하도록 상주했고, 또한 넓게 논밭을 개간하여 빈민을 모집해 경작하게 했다. 그 결과 식량이 충족되었으므로, 그것을 금이나 말 등과 교환하여 조정에 납부했다. 민간의 무기를 몰수하는 한편, 인의로 이끌고 교화를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서역과의 통교의 길을 열어, 먼 곳의 이민족이 조공하게 하는 데도 훈공이 있었다.

강족의 가오를 토벌하고, 도정후가 되었으며, 300호의 소유지를 하사받았고, 건위장군의 군위를 얻었다. 강족에 대해서는, 작은 과실에는 눈감아 주는 한편, 큰 죄에는 지도자에게 알리는 등 절차를 거친 후 엄벌에 처하여 그들의 심복과 존경을 얻었다. 상은 모두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복을 채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자식은 의식에도 곤궁한 상황이었다. 조예는 이를 가상히 여겨, 수시로 지급을 베풀었다.

정시 원년(240년)에는 대사농, 정시 2년(241년)[2]에는 사례교위로 옮겼다. 이때,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을 위해 속관을 모아, 그녀 스스로 결혼 상대를 고르게 했다. 딸은 왕준을 골라, 그의 곁으로 시집갔다[3].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사임한 후, 광록대부로 임명되었다.

정시 9년(248년) 4월[4], 사공으로 추대되었지만, 도의와 노령을 이유로 취임을 굳게 사퇴했다. 가평 원년(249년)에 대부의 신분으로, 78세로 사망했다. 장례는 삼공의 예로 거행되었고, '''무후'''로 시호되었다.

가평 6년(254년), 마찬가지로 이미 사망했던 전예호질과 함께, 과거의 공적과 청렴한 생활 태도가 평가되어, 남은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는 일족에게 곡물과 돈이 지급되었다.

서막은, 조조 시대에는 쾌활하다고 여겨졌고, 만년에는 강직하다고 여겨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노흠은, "모개최염 등이 정치를 담당하고 있을 때는 청렴한 선비가 존중받았고, 사람들은 수레와 옷을 고쳐 명성을 구했다. 이 시대에 서공(서막)은 쾌활하다고 여겨졌다. 근년, 천하는 사치에 흘렀지만, 서공은 평소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속인과 동조하지 않았다. 이것은 속인의 항상성이 없고, 서공의 항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등과 같이 말하며, 서막을 칭찬했다.[5][6] 동진의 원굉의 "삼국명신서찬"(『문선』수록)에서는 의 9명, 의 4명, 오의 7명이 명신으로 칭찬받고 있으며, 그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2. 1. 조조 시대

조조가 하북(河北)을 평정했을 때 등용되어 승상군모연(丞相軍謀掾)이 되었다. 시험 삼아 봉고현령을 맡은 후, 동조의령사로 옮겼다. 가 번국으로 건국되자 상서랑이 되었다. 당시 금주령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서막은 술을 마시고 취해 곯아떨어져, 직무상의 질문에 "성인(청주의 은어)에 당했다"라고 대답하여 조조의 분노를 샀다. 선우보는 이를 "서막은 신중한 성격으로, 우연히 술에 취해 내뱉은 말일 뿐입니다"라고 변호했고, 서막은 법에 따랐지만 형벌은 면했다.

조조 시대에 서막은 쾌활하다고 여겨졌다.

2. 2. 조비, 조예 시대

조조가 하북을 평정한 때 발탁되어 승상 군모연이 되었고, 시험 삼아 봉고현령을 맡은 후, 동조의령사로 옮겼다.[2] 가 번국으로 건국되자 상서랑이 되었다.[2] 당시 금주령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서막은 술을 마시고 취해 곯아떨어져, 직무상의 질문에 "성인(청주의 은어)에 당했다"라고 대답하여 조조의 분노를 샀다.[2] 선우보는 이를 "서막은 신중한 성격으로, 우연히 술에 취해 내뱉은 말일 뿐입니다"라고 변호했고, 서막은 법에 따랐지만 형벌은 면했다.[2]

그 후, 농서태수・남안 태수가 되었고, 조비(문제)의 즉위 후에는 초현령・평양 태수・안평 태수・전농중랑장을 역임했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얻었다.[2] 조비는 과거 서막의 발언을 끌어내 놀렸지만, 서막이 기지에 찬 대답을 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여 무군대장군군사로 임명했다.[2]

조예(명제)가 즉위한 후 태화 2년(228년)[2], 촉한과의 국경 지대인 량주의 자사로 임명되었고, 사지절 호 교위를 겸임했다. 같은 해, 제갈량이 위령으로의 북벌을 시작하여, 천수군의 기산에 침입하자, 이에 호응한 농우 삼군(천수군・남안군・안정군)이 반란을 일으켰다.[2] 서막은 참군과 금성태수 등을 파견하여 남안의 반도를 격파했다.[2]

하우 일대는 비가 적어 항상 곡물 부족에 시달렸다.[2] 서막은 염지를 수리하여 미개척지에서 곡물을 수확하도록 상주했고, 또한 넓게 논밭을 개간하여 빈민을 모집해 경작하게 했다.[2] 그 결과 식량이 충족되었으므로, 그것을 금이나 말 등과 교환하여 조정에 납부했다.[2] 민간의 무기를 몰수하는 한편, 인의로 이끌고 교화를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서역과의 통교의 길을 열어, 먼 곳의 이민족이 조공하게 하는 데도 훈공이 있었다.

강족의 가오를 토벌하고, 도정후가 되었으며, 300호의 소유지를 하사받았고, 건위장군의 군위를 얻었다.[2] 강족에 대해서는, 작은 과실에는 눈감아 주는 한편, 큰 죄에는 지도자에게 알리는 등 절차를 거친 후 엄벌에 처하여 그들의 심복과 존경을 얻었다.[2] 상은 모두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복을 채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자식은 의식에도 곤궁한 상황이었다. 조예는 이를 가상히 여겨, 수시로 지급을 베풀었다.[2]

2. 3. 사망

정시 9년(248년) 4월[4], 사공으로 추대되었지만, 도의와 노령을 이유로 취임을 굳게 사퇴했다. 가평 원년(249년)에 대부의 신분으로, 78세로 사망했다. 장례는 삼공의 예로 거행되었고, '''무후'''로 시호되었다.[2]

가평 6년(254년), 마찬가지로 이미 사망했던 전예호질과 함께, 과거의 공적과 청렴한 생활 태도가 평가되어, 남은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는 일족에게 곡물과 돈이 지급되었다.[2]

서막은, 조조 시대에는 쾌활하다고 여겨졌고, 만년에는 강직하다고 여겨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노흠은, "모개최염 등이 정치를 담당하고 있을 때는 청렴한 선비가 존중받았고, 사람들은 수레와 옷을 고쳐 명성을 구했다. 이 시대에 서공(서막)은 쾌활하다고 여겨졌다. 근년, 천하는 사치에 흘렀지만, 서공은 평소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속인과 동조하지 않았다. 이것은 속인의 항상성이 없고, 서공의 항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등과 같이 말하며, 서막을 칭찬했다.[5][6] 동진의 원굉의 "삼국명신서찬"(『문선』수록)에서는 의 9명, 의 4명, 오의 7명이 명신으로 칭찬받고 있으며, 그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3. 평가

4. 삼국지연의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魏方鎮年表
[3] 서적 晋書
[4] 서적 三国志
[5] 문서 명신20선
[6] 문서 景山恢誕 韻與道合 形器不存 方寸海納 和而不同 通而不雜 遇醉忘辭 在醒貽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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